서기 | 여행

서기여행 <종묘를 가다>

Atomseoki 2018. 6. 23. 14:42
반응형

<종묘정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유형유산 중 하나인 종묘를 다녀왔다. 책이나 방송 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종묘를 이제서야 보게 되었다. 유홍준 교수님 편 'JTBC 차이나는 클라스'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편)'를 읽고 꼭 가보고 싶었다.


국보 227호인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이며 일종의 신전이다. 종묘는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종묘 정전은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을 두른 이 정전은 길이가 주는 장중한 자태가 보이는 이들을 압도한다.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장엄하고 웅장한 정전을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서 찍어야 겨우 한 컷에 다 담을 수 있었지만 정전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직접 보아야지만 장엄한 공간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정전 앞의 이 거대한 공간은 월대(月臺)라고 불린다. 가로 109미터 세로 69미터인 이 공간은 비움 자체이며 절대적 공간이다. 1미터 남짓한 이 높이의 월대는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되며, 이 월대가 있음으로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현재 종묙는 19칸의 정전과 16칸의 영녕전, 공신각과 칠사당 그리고 제례를 위한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규모 7칸으로 작았다.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바꿨다. 긴 건물 양끝에 월랑(月瑯)을 달아 짧은 디귿 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종묘에 정전 옆에 영녕전이라는 별묘를 건립도 태종이하였다. 종묘에 모실 수 없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영녕전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였다.(보물 821호) 신실 4칸을 만들고 양옆에 익실을 1칸씩 붙인 6칸 건물이 되었다.


< 종묘 영녕전 >


왕조가 이어지며너 정전과 영녕전을 계속 증축하였고, 영녕전은 좌우 익시을 각각 2칸씩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인 16칸을 갖췄다. 이리하여 현재 정전에는 19분의 왕(왕비까지 49위)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16분의 왕(와비까지 34위)을 모셨다.


< 향대청 내부 >


향대청은 종묘제례 때 쓰는 향(香). 축(祝), 폐(幣)를 보관하는 장소이자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제복으로 갈아입고 대기하던 곳이다. 


< 공민왕 신당 >


향대청 한쪽에는 고려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신위를 모신 공민왕신당이 있다. 이는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전 왕조 고려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마련한 것이다.

정식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봉안지당'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도 사당 안에 있다. 조선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밖에 향대청 앞에 중연지를 볼 수 있다. 네모난 연못 중간에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연못은 세종 25년 조성된 것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의미이며 물은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 매체이다.


종묘를 걷다보면 신로(神路)를 볼 수 있다. 이 곳의 가운데 길은 신로로서 보행을 자제해야 한다. 이 신로를 따라 종묘를 둘러보며 종묘 건축의 참된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유홍준 교수님의 종묘의 답사의 적기로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으셨다. 미세먼지 없는 한 여름에 찾은 종묘도 아름다웠지만 눈 덮힌 겨울날 다시 꼭 와보고 싶은 종묘이다.


또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기회가 된다면 꼭 참관해보고 싶다.